얼마전,
위와 장이 (지겹게) 또 아팠다. 아무것도 먹지도/하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서 끙끙거리다 책이라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침대 아래에 흐트러진 책 한 권을 들었다. 이 쪽 저 쪽 훑어 보며 읽기 시작했고, 그녀는 따뜻한 물수건을 내 배 위에 올려 놓은 뒤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나는 책 읽기를 잠시 멈췄다. 그리곤 방금 읽은 한 페이지를 소리내어 읽었다.
아이는 아프다. 어머니는 아이를 침대에 데려가 눕히고 그 곁에 앉는다. 그리고 나서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나는 N.이 자기 부인의 손이 지녔다는 특이한 치유력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인의 손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손동작은 참으로 많은 표현을 함축했었죠. 그렇지만 그 동작들이 무엇을 표현하는지는 기술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 동작들은 마치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야기(들려주기)를 통해 병을 치유한다는 것을 우리는 메르제부르크의 마법의 단창구(短唱句)의 예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그 단창구들은 오딘의 주문들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시가(詩歌)는 오딘이 그 줌누들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된 사정에 대해 얘기를 전해주고 있다. 또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한 환자가 진료 초기에 의사에게 들려주는 얘기가 그 환자의 치료과정의 시작이 될 수 있는지를 안다. 그리하여 이야기라는 것이 많은 치유의 참다운 분위기와 최적조건을 이루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 생겨난다. 그렇다. 모름지기 병이란 그것이 이야기 들려주기(서사)의 흐름 속에서 충분히 멀리 떠내려 보내질 수만 있다면 치유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물음이 생겨남직하다. 우리가 고통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을 막는 댐과 같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고통의 댐은 이야기 흐름의 착차가 충분히 클 경우, 그러니까 그 흐름의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지복한 망각의 바다로 쓸어가버릴 정도로 클 경우,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머니가 침대 맡에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는 이 흐름의 하상(河床)을 그리는 작업인 셈이다. [발터 벤야민,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옮김, 이야기와 치유,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도서출판 길]
나도. 그녀도. 그 신비로운 순간 속에서 서로에게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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