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ree Questions Presentation" 자료집에 들어갈 글입니다. 예산이 없어서 자료집이 언제 나올지는 미지수.
서성이며.
이 글은 Three Question Presentation 에서 발표했던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그 때의 이야기를 다듬어 글로 옮긴다는 의미에서, 그 발표를 기억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나의 발표는 한마디로 끔찍했다. 준비가 덜 됐었다. 핑계가 아니라 냉정한 평가다. 준비가 덜 된 발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하는지 다시 한번 배웠다. 한동안-가끔. 발표했던 때를 떠올리며 주제의 버거움에 대해 아쉬워하곤 했었다. 하지만 무엇을 탓 할까. 소화할 수 없는 부족함, 소화하지 못할 것을 먹으려 했던 무모함 때문인 것을. 부끄러운 발표를 소급하는 지금도 그렇다. 한참을 앉아 키보드 사이를 머뭇거린다. 손가락이 무겁다.
우리, 임은경과 나의 주제는 ‘작업의 뒷면|작업의 정면’이었고 우리는 이 주제를 ‘작가의 삶|작가의 작업’으로 전환시켰다. 물론 여기서 작가는 작업을 하는 작가와, 비평을 하는 작가를 말한다. 나에게 작가란 바깥의 목소리와 만나기 위해 안간힘 쓰는 사람들이다. 분과적 차이로 인한 각자의 입장이 있을지 모르나 우리는 그 차이 속에서도 만난다. 나는 임은경과 함께 보낸 시간에 속에서 건져낸 이 주제가 탐탁지 않았다. 작가와 비평가의 차이에 무던하듯, 나는 작업의 뒷면과 작업의 정면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작가의 삶|작가의 작업도 역시 그렇다. 그것을 어찌 툭 나눠 얘기할 수 있을까? 차이가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나눠지는 순간 붙여지는, 혹은 붙여지는 순간 나눠진다. 뒷면에서 시작해 정면으로 관통하며 정면은 다시 뒷면으로 사라진다. 내가 그 겹쳐진 사이를 어떻게 고정시켜 얘기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한 일이긴 하나? 최근 이런 사이 공간에 대해 자신이 얘기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의심의 눈이 씻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주제를 왜 그렇게 잡았을까? 그것은 정말 우리의 공통 관심사였을까? 왜 만남의 시간만큼 담아내지 못했을까? 확답할 수 없다. 그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어느덧 그렇게 잡혀져 있었단 거다. 임은경과 나의 만남 속에서 어느덧 나와 있었단 얘기다. 삶에 대한 물음조각 같은. 그러고 보면 임은경과 나는 작업에 대한 얘기보다 서로의 삶에 대해 더 많이 얘기했었고 귀 기울였었다. 알았다고 말하기도 몰랐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우리가 그 옷을 입기에는 아직 숨이 찬다는 것을. 눈치 챘을지도 모르나 우리는 눈감았던 것 같다. 왜였을까? 아마도 어쨌거나 그것이 삶이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거부할 수 없는.
얘기가 길어졌다. 발표와 글을 쓰는 시간차가 나에게 또 다른 숙제를 줬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의 삶|작가의 작업이란 주제를 버릴 순 없다. 그렇지만 다 담아낼 수도 없다. 해서 나는 이를 더 좁히고 잘라내어 얘기할 생각이다. 나는 발표 당시 세 질문 중 앞의 두 질문에 대해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 두 질문은 세 번째 질문을 위한 과도한 붙임, 서걱거리는 전제였기 때문이다. 나는 세 번째 질문 말미에 급히 문 열어 놓고 닫아버린 그 곳에서 시작할 셈이다. 그것은 내가 가고자 하는 작가의 삶과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에 대한 생각의 단면이다. 더 개인적이고 작은 얘기가 될 것 같다. 여전히 잘 풀어 낼 수 있을지, 다른 목소리들과 얼마나 잘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회가 만들어낼 여분에 대해 기대를 걸어 본다.[1]
작가
작가란 뭘까? 내가 작가인가? 언뜻 봐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질문은 대답하는 순간 함몰된다. 그래서 피했었다. 피하다 보니 어느새 무뎌졌다. 비겁해져 있었다.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 윤동천선생에게 빚을 졌다.[2] 그의 글 ‘고백록’ 말미에는 작가에 대한 정의가 있는데 나에게 그 정의는 ‘맞아 이거야.’라는 응답이 아닌, ‘그렇다면 나는 어떤 작가가 될 수 있을까.’와 같은 물음으로 다가왔다.[3] ‘무엇-왜’에 대해 ‘어떤-어떻게’로 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어떤 작가가 되고 싶은가? 여기서 나는 작가가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닌 어떤 것에 대해 (제한적으로) 얘기해 볼 생각이다. 물론 작업 바깥의 작가는 없다. 하지만 작가의 활동이 작업만 있는 것도 아니다.
작가가 작업에 등장하는 것, 작업을 만날 때 작가를 불러내는 것은 작업마다 작가마다 편차가 있다. 다양하다.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임의적이다. 임의적이란 의미에서 작가와 작업은 느슨해지기도 멀어지기도 하지만 완전히 떨어질 수도 없을 것이다. 뒤집어 보면 작가=작업이 결코 될 수 없단 얘기다. 작가와 작업을 연결하는 선에는 많은 것들이, 그리고 그것들 속에 작가의 활동이 놓여 있을 것이다.
활동과 작업은 다를 수 있다. 활동이 작업이 되기 위해선 어떤 선 넘기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정치적 입장 표명이나 사회적 활동을 쉽게 작업으로 불러내는 경우를 보곤 하는데, 이는 작업 이전부터 활동의 영역에 있었던 이들을 소외시킨다.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예술은 아니다. 가능성과 주장이 설득과 공감으로 조건 없이 이동하진 않는다.
(어떤) 활동은 작업을 흔들기도 한다. 어떤 활동은 작업을 배반하는 장면이 되기도 한다. 여러 장면이 있겠지만 특히 전시 더 나아가 자본과의 관계에서 그렇다. 작업이 자본으로 교환되는 것 혹은 (상업)갤러리 시스템 전반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다. 필요하다. 하지만 무조건 이동해서는 안 된다. 작업이 어떤 맥락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 어떻게 그 안에서 작업이 유효한 작동을 일으킬 수 있는지, 말 할 수 있어야 한다.[4] (전시 참여에 있어서도 그렇다.) 작가도 먹고 살아야지.란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부족하다.
(어떤)활동은 작가로서의 영역이 아닌, 사적 영역이라 불리는 삶의 경계를 건들기도 한다. 작가 김시원=인간 김시원이 아니다. 하지만 그 경계 역시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임의적으로 선택되거나 작동한다. 이런 불명확함과 임의성이 공간과 영역을 가로지른다. “그것은 사적 영역이다. 작가=작업이 아니다. 작가 김시원=인간 김시원이 아니다.” 틀린 답변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 작업과 작가를 뒤흔드는 목소리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충분한 답변은 아니다.
(어떤) 활동은 작가와 작업 사이에서 작가와 작업에게 무언가를 요청한다. 느슨하게 때론 강력하게. 이것은 도덕적, 정치적 요구가 아니다. 생각해 보면 이 판단의 시작에는 작가가 있다. 우리는 바깥에 기대어 책임을 비껴 나가거나 기대어 갈 수 있다. 그것은 임의성을 자의성으로 얼려 버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자의성이 닫아 놓은 임의성을 열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 여러 번 자리를 오고 가며 다르게 싸우고 충돌해야 한다. 그런 작가를 상상해 본다. 될 수 없을까?
피곤한 일이다. 그렇지만 오늘 또 한번 물어본다.
작업[5]
작업은 어떤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그 목소리는 아마도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나는 이 시작과 과정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지기 위한 가능성이 거기 있다. 작업은 바깥과 떨어질 수 없다. 온전하게 개인적인 것은 없다. 그런 효과는 있을 수 있다. 스스로 그 효과를 불러내고 그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속상한 일이다. 전시장에 그냥 작업을 놓는다고 바깥과 만나지는 것은 아니다. 작업이 바깥을 보고 만나려고 해야 한다. 독백일지라도 만남의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작업을 통해 만난다면 만남은 바로 거기서 시작될 것이다.
작업이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으면 좋겠다. 공적인 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서는 통로도 좋다. 사적인 영역은 개인적인 이야기만을 뜻하지 않는다. 공적인 영역도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지점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개인적이지 않은 목소리에서 개인의 분열을 발견할 수 있다. 정치적인 맥락과 무관한 행위 속에서 정치적 폭발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은 반갑지 않다. 작업이 마침표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가장자리에 점이 찍힌 원을 상상해 보자, 원을 돌려보면 점은 어느새 가운데로 이동한다. 그것은 원의 가장자리에 찍힌 점을 봤던 공간에서, 원 가운데에 찍힌 점을 보는 공간으로의 이동이기도 하다. 작업은 원이 되기도, 점이 되기도 한다. 둘 다 일수도 있겠다. 이렇게 서로의 자리를 주고받으며 다른 각도로 움직일 수 있는 통로에서 우리가 만난다. 작업이 그 통로를 가졌으면 좋겠다. 어제의 작업(작가)이 오늘의 작업(작가)보다 먼저 내일에 자리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의 통로를.[6]
가능성은 불가능성을 품고 있다. 작업은 작업이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어느 한 면, 한 지점으로 내접된다. 그것은 단면의 구조와 질서를 따라가는 복종의 과정이기도 하다. 완전함에 대한 욕망이, 완결성에 대한 요청이 우리를 그 질서로 이끈다. 하지만 단면의 질서는 다른 방향, 샛길을 배제함으로써 닫혀진다. 작업은 언제나 불완전한 작업이다.
불완전한 작업이 작업의 한계라면, 가능성 또한 거기 있을 수 있다. 다른 작업의 출몰을 가능케 하는 공간. 원을 세모로, 세모를 네모로, 이동할 수 있게 만드는 가능성. 그것은 허점이 많은 작업,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작업과는 다르다. 불완전함을 긍정하는 것. 그것은 막다른 골목에서 다른 길로 이동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막다름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원은 원의 내파를, 세모는 세모의 내파를, 네모는 네모의 내파를.[7]
작업에서 쉼을 볼 수 있었으면, 작업이 쉼을 가졌으면,
좋겠다.[8]
서성이며.
나는 나의 질문들에 대해 작업하기와 작가하기로 보여줘야 한다는 말을 흘렸었다. 나에게는 글쓰기 또한 작업이다. 글쓰기는 말할 수 없는 작업을 보충하거나, 작업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는 점에서 나에게 중요하다. 하지만 작업에서 부족함을 매 순간 느끼듯, 글쓰기에서도 매 순간 부족함을 느낀다. 그렇다면 부족한 작업에 대해 부족한 글쓰기가 덧붙여지거나, 부족한 글쓰기에 부족한 작업이 덧붙여지는 셈이 된다.
우회하겠다고 시작한 나의 글쓰기는 어쩌면 우회하여 다시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2009/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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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이 부분에 있어서 그 누구에게도 양해를 구하지 않았다. 이런 독단적인 판단에 대해 무명씨, TQP 참여자들, 청중들, 그리고 (특히나) 은경씨에게 죄송할 따름이다. 발표 당시 나의 세 질문은 ‘작업은 작업으로서만 평가할(받을) 수 있는가?’ ‘좋은 작업(작가)은 좋은 작가(작업)를 보증하는가?’ ‘작가와 작업을 어떻게 함께 볼 것인가?’였다. 나는 여기서 ‘작가’와 ‘작업’을 떼어내고 이를 ‘내가 되고 싶고 하고 싶은’ 작가와 작업으로 한번 더 떼어내려 한다. 나에게 이 세 질문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입을 떼기 어려운, 벅찬 물음이다. 나의 제한은 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책임지고 싶은 생각에서 출발했다. 나는 내가 얘기하지 않아도 이 글 어딘가에 그 때의 생각들이 묻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덧붙여, 이런 질문은 ‘답하기’보다 작가하기와 작업하기의 과정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2] 윤동천 선생뿐만 아니라 최빛나씨에게도 빚을 졌다. 이 둘은 그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했다기 보다, 무책임과 회피로 일관했던 나 자신에게 반성의 시간을 불러 내게 하였다.
[3] “자신이 작가라는 자각을 가진 자, 지속적으로 작품을 제작, 발표하는 자, 예술제도(세계)에 편입된 자, 마음을 움직이는 자, 보다 나은 삶으로 이끄는 자, 다섯 항목으로 분류했다.” 자세한 내용은 “예술적 영혼에 상처받은 꿈을 위하여(2000/재원)”에 실린 <고백록>을 참고할 것.
[4] 무엇보다도 나는 작업이 자본 친화적인 것보다, 하나의 지적 게임으로 그치는 것(작업, 태도, 등)을 더 경계한다.
[5] 나는 작품이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6]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의 1부와 2부 사이에, ‘글쓰기와 차이’를 넣어 ‘글쓰기와 차이’의 결론이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의 2부가 될 수 있음을, 반대로 ‘글쓰기와 차이’의 5번째 논문 뒤에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를 넣어 6번째 논문을 잇는 다리가 될 수 있음을, 또한 ‘목소리와 현상’이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의 참조가 될 수 있음을 얘기하였다. (함의 - 앙리 롱스와의 대담, 입장들, 자끄 데리다) 이런 글들을 접할 때마다 나는 미술에서의 다른 가능성을 생각, 상상한다.
[7]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모더니스트 페인팅’을 밀어 붙이면 ‘도널드 저드’의 ‘특수한 사물’이 나오는 예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저드는 객관적 회화에 대한 그린버그의 요청이라고 추정되는 것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나머지 사물들을 창조함으로써 회화 자체를 넘어서 버린 것이다.’ (미니멀리즘이라는 교차점, 실재의 귀환, 할 포스터)
[8] 그것은 가능성과 열림이 여기 있다고 스스로 말하는 작업과는 다르다. 이런 작업은 자기기만적이다. 이미 기획된 가능성, 기대하고 열어놓은 열림일 뿐이다. 가능성이 스스로 열리는 것은 예상을 벗어난 체로 벌어진다. 그것을 충분히 감지했을지라도 말이다. 그것은 어쩌면 사후적인 만남일 수도 있다. 그것은 말하지 않고 말하기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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